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1980년 [[서울의 봄]]부터 [[서울역 회군]] 및 당시 군부의 동향 ===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유신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 발전 약속 등으로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11.26.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개헌 특위)를 설치하는 등 국회 주도의 헌법 개정을 추진한 한편, 최규하 대통령은 12.21. 취임사를 통해 정부도 별도로 헌법 개정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할 것임을 밝힌 데 이어, 1980.1.18. 연두기자회견에서 헌법상 개헌안의 발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개헌 작업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80.3.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것임을 밝혔다. 1979.12.18.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이고, 정치는 애국심과 양식있는 정치인에 의해 발전되어야 하며, 군은 조속한 시일 내에 계엄목표를 완수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 갈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1980.2.9. 신민·공화 양당은 대통령중심제, 대통령 직선, 임기 4년, 1차 중임을 골격으로 하는 헌법 시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할 예정임을 발표했다. 신학기 개학을 앞둔 1980.2.18.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1/4분기 이전에 폭동진압 훈련인 충정훈련 실시를 완료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3.6.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특전사령관, 1, 3, 5, 9 공수여단장, 20, 26, 30 사단장,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서울시경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80년도 제1차 충정회의를 개최하여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태세를 점검하였는데, 회의 결과 대규모 학생 시위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을 이상주의적 맹목 저항 세력으로 규정하고, 문제 학생과 교수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며, 군투입을 요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강경한 응징 조치가 요망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80.2.29. 최규하 대통령은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 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위반자 등 687명에 대한 사면·복권읕 단행하였고, 이로써 항간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다고 운위되기에 이르렀다. 80.4.7. 신민당 입당 여부로 관심을 모아오던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는 신민당이 자신과 재야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며 신민당 입당 포기를 선언하였고, 이에 대하여 윤보선 국민연합공동의장은 김대중 씨가 국민연합에 돌아와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은 환영하나 신민당 입당 포기는 성급한 것으로 유감임을 밝혔다.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4.16. 한국신학대학에서 복권 이후 첫 대중 강연에 나서, 학생들은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오기 전에는 폭력 행사를 자제해야 하며,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읕 강조하였고, 4.25.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민주회복이 급선무라고 하면서도 대통령 출마 의사와 신당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 이른바 이원집정부제나 중선거구제는 반민주적 발상이므로 단호히 배격한다고 하였으며, 4.29. 윤봉길의사 추모제에 참석, 민주화촉진 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유신체제가 붕괴된 후 그 동안 억눌렸던 사회 전 분야의 다양한 주장과 욕구가 급격히 분출하는 가운데,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면서 학원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을 요구하며 21개 대학에서 시위·농성을 벌였고, 24개대학에서 어용 교수 퇴진을, 12개 대학에서 재단 비리 척결을, 11개 대학에서 학교 시설 확충 둥을 요구하는 시위·농성을 하는 등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내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으며, 4월 중순에 접어 들면서 병영 집체훈련 거부 문제가 투쟁 이슈로 전면에 등장하였고, 4.24. 서울시내 14개 대학 교수 361명은 족벌 운영 사학 경영자 퇴진, 군사 교육 개선, 교수 재임용제 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학원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80.5.1. 서울대 총학생회는 철야 회의 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입영훈련 거부투쟁을 철회하는 대신, 계엄령 즉각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신현확 사퇴, 정부 주도 개헌 중단과 노동3권 보장 등을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5.2. 서울대학생 1만여명이 5.2.부터 5.13. 까지를 민주화 투쟁기간으로 정하고 교내 시위와 철야 농성에 들어감을 분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는 정치문제에 관한 시국 성토로 확산되었다. 한편 근로자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지기 사작하여, 4.9.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 농성투쟁을 신호로 하여 4.29.까지 전국에서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고, 4.21.에는 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광업소 근로자 3천5백여명이 사북 경찰지서, 사북역 등 사북읍을 점거하는 [[사북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사북사건이 진정된 이후에도 90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고, 5월에 들어서도 노사분규는 계속 확산되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80.4.30. 긴급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학원 및 노동계의 폭력이나 소요사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일부 학생과 정치인들이 사회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학원을 정치 선전장화하는 행위는 규탄받아야 하며,불법적 행동이 계속된다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천명하는 한편, 예하 부대에 소요진압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후속하여 육본은 80. 5.3.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5.6.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 진압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5.6.부터 5.9.까지 2군 및 수도권 지역 전부대를 대상으로 소요 진압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5.8. 01:00 포천군 이동에 주둔하고 있던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5.10. 01:00 화천군 오음리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여단읕 김포 1공수여단 주둔지로 각 이동배치하였음. 80. 5.9에는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5.13. 1군 경장갑차 26대를 수경사에, 3군 경장갑차 24대를 수도군단에 각 배속 조치하였다. 대학가 시위가 가열화되고, 학생들은 물론 일부 대학 교수들도 선언문을 통해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가운데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5.9. 기자회견에서 혼미한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계엄령 해제, 정부의 개헌작업 중지, 임시국회 즉각 소집 등을 촉구하였고, 그 동안 임시국회 소집, 계엄령 해제 등에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공화당도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계엄 해제 문제도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한편 그 동안 비폭력적 교내시위를 표방한 가운데 간헐적으로 교외 시위를 시도하던 대학가는 5.13. 연세대학생들이 주축이된 서울시내 6개 대학 대학생 2천5백여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를 벌이고, 고려대학교 등 시내 7개 대학이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5.14. 서울 지역 27개 대학 대학생 7만여명이 총학생회 대표들의 전면적 가두시위 결의에 따라 동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히 화신앞, 남대문, 서울역, 광화문 등 서울 중심가를 메우면서 22:15경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자,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신현확 총리에게 경찰력만으로 서울시내 일원의 학생 시위에 대처할 수 없다며 군의 투입을 건의하는 한편, 이희성계엄사령관에게도 군이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5.13. 대학생들이 가두로 진출, 시위를 벌이자, 육본은 5.14.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지시를 하달하여, 수경사는 특전사 예하 1, 5, 11, 13의 4개 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북지역의,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남지역의,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2개 연대를 작전통제하여 부산, 대구, 광주지역의 각 소요사태 진압을 준비하도록하는 한편, 동일 17:30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하고, 18:25 청와대, 중앙청 등 특정경비지역 방어를 위하여 광화문 지역 경찰 저지선 뒤에 수경사 6개 중대를 배치한 데 이어 20:29 전국 방송국 및 중계소에 경계 병력을 배치하였다. 5.15. 12:00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61, 62연대가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출동하였고, 이어 20사단 60연대는 5.17. 00:01 태릉으로 출동하였으며, 5.16. 오후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7. 10:00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였다. 80.5.15. 14:00경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는 서울시내 35개 대학 대학생 10만여명이 집결하여 3일째 시가지 시위를 벌였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둥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대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감행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서울역 앞 시위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https://youtu.be/yJGKwr1JhxU|버스 1대가 시위 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동일 19:50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늦어도 년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 양대 선거를 실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추호도 변동 없이 지켜가고 있으며, 정치 일정을 최대한 단축하고 계엄령도 사회가 안정되면 즉시 해제할 것이므로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과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였으며, 중동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지아에 기착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5.16. 22:30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하였다. 격렬한 시위를 마친 서울대 등 서울 시내 23개 대학과 24개 지방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15. 자정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일단 가두 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함에 따라 5.16. 서울,부산, 대구, 전주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정상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전남대, 조선대 둥 광주시내 9개 대학 대학생 2만여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야간에는 횃불 시가 행진을 벌였다. 5.16. 09:30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주도 개헌작업 포기, 정치일정 연내완결 확정 발표 등 6개항의 시국수습 대책을 공동발표하였고, 국민연합은 5.7.자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에서 요구한 사항에 대하여 5.19.까지 정부가 답변을 하지 않으면 5.22.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제2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이화여대 동창회관으로 자리를 옮긴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5.19.까지 전두환·신현확 퇴진, 비상계엄 해제 및 연내 정권 이양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민연합이 전국주요 도시에서 동시 개최하기로 한 민주화촉진선언 국민대회일인 5.22.부터 대규모 가두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학생들의 잇단 대규모 가두시위로 형성된 불안한 데모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5.17.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여야 국회의원 186명의 요구에 따라 제104회 임시국회를 5.20. 10:00에 소집할것을 공고하였고, 국민들은 5.16. 밤 급거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이 시국수습을 위하여 어떤 단안을 내릴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월 초 학내 문제로 시작한 대학가 시위가 정부와 군부를 상대로 한 정치 투쟁으로 변모하면서 가열되자,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수습 방안」검토를 지시하였고, 5.10.경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정보처 정세분석반의 보고에 따라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단장에게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들을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5.16.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은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하여 5.17. 24:00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시위의 주동자와 배후조종자들을 일제 검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